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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9장 중요한 주제와 묵상

게으른책벌레 202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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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기준과 부르심, 제자도를 향한 도전

마태복음 19장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유대로 내려가시는 길에 말씀하신 중요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결혼과 이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 부자 청년의 질문과 제자의 삶이라는 주제들이 중심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사회가 가지고 있던 종교적 편견과 제도적 경계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십니다.

창조 질서로 돌아가라: 결혼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19장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19:3). 이 질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논쟁이 많았던 문제로, 율법에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서 이혼할 수 있다고 한 말씀(신 24:1)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시선을 창조의 본래 뜻으로 돌리십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19:4-5). 예수님은 결혼을 단지 인간 사회의 제도나 계약이 아닌,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 질서로 보십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연합을 인간이 임의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9:6).

바리새인들이 반문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19:8).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의 허용과 하나님의 본래 뜻을 구분하십니다. 이혼은 죄로 인한 현실의 타협이지만, 결혼의 본래 목적은 평생을 함께하는 언약적 연합입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많은 깨어짐과 상처 속에 있고, 결혼 관계 또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고려하시되, 그것을 정당화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정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자고 하십니다.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붙드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어린아이처럼 받들어야

결혼과 이혼에 대한 말씀 이후,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19:14). 그리고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그곳을 떠나십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18장에서의 교훈과 연결됩니다. 어린아이는 연약하고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자격이나 업적으로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의지하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아이들을 사랑하셨다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린아이를 단지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들의 순전함과 전적인 의존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자기 자랑을 내려놓고, 오직 은혜로 주님의 품에 안기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이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영생을 묻는 부자 청년, 좁은 길의 제자도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16).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사람이었고,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본질적으로 행위 중심의 사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을 언급하시고,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9:21)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지 물질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청년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했기에, 결국 근심하며 떠나갑니다(19:22). 이 장면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 단순한 도덕적 선행이나 율법의 준수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전적인 자기 포기와 헌신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3-24). 이는 문자적인 불가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할 때 생기는 영적 장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놀라 묻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이 말씀은 구원의 본질이 인간의 노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복음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결코 스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자기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따라가는 좁은 길입니다.

버림과 따름의 보상: 제자도 위에 임하는 약속

베드로가 묻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즉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19:28). 그리고 이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상과 영광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보상 체계와는 다른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의 계산이나 논리, 순서와는 다르게 운영된다는 뜻입니다.

제자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지만,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헌신을 기억하시며,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풍성한 보상과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보상이 우리의 자랑이 되지 않도록, 주님은 마지막까지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오직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는 그 앞에 순전함으로 서야 합니다.

전체 결론

마태복음 19장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제자도의 길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결혼과 이혼, 어린아이의 믿음, 부자 청년의 이야기, 그리고 제자의 보상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외형적 경건을 넘어 마음의 중심과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며, 그 은혜 앞에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이지만,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생명과 영광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부르심 앞에 진실하게 응답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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