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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3장 중요한 주제와 묵상

게으른책벌레 2025.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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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과 위선에 대한 심판, 참된 겸손과 회개의 부름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일곱 가지 화를 선언하시는 장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종교적 권위를 오용한 자들에 대한 예언자적 심판 선언입니다. 이 장은 구속사적으로, 옛 언약 아래서 백성들을 진리에서 떠나게 한 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참된 지도자는 겸손과 섬김으로 사는 자라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일곱 가지 화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23:2-3)고 하십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스스로는 지키지 않고,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며, 그 짐을 손가락 하나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모든 행위를 하며, 옷자락을 넓게 하고 옷단을 길게 만들고, 잔치 자리에서 윗자리를,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23:8)고 하십니다. 또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1-12)고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로 일곱 번 반복하여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막습니다(23:13). 이는 복음을 가로막는 자로서의 책임을 강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또한 한 사람을 개종시키기 위해 두루 다니다가, 오히려 그 사람을 자신보다 더한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듭니다(23:15).

그들은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하며, 성전이나 제단보다 금이나 예물을 더 중요시합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이 아닌 물질 중심의 신앙 왜곡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철저히 지키면서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율법의 더 중요한 본질은 버립니다(23:23).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23:24)라고 강하게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하시며,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겉은 아름다우나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였고, 지금도 예언자들을 박해하며, 자신들이 조상들의 죄악을 이어가고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이 일곱 가지 화는 단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경고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도 외식, 형식주의, 자기의, 그리고 사랑 없는 율법주의가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거짓된 경건을 거부하시고, 진실한 회개와 순종을 원하십니다.

겸손한 자만이 높아진다: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

예수님은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신 후, 제자들에게 참된 리더십의 본을 가르치십니다. 그는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아버지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23:8-10). 이는 단순히 호칭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사람을 높이고 지위로 서열을 나누려는 인간적 욕망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권력을 갖는 것이 성공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이며,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집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이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로 오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랍비 정신, 곧 권위와 인정에 대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목회자나 리더, 교사, 직분자는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형식을 넘어 진정한 영적 리더십은 겸손과 희생, 사랑 안에서 나타난다고 가르치십니다.

진정한 영적 권위는 자리를 주장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감추고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자가 주께 높임을 받습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아지는 자가 하늘의 보좌 앞에서 존귀함을 입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눈물과 심판의 예언

예수님은 장의 마지막에서 슬픔에 찬 외침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23:37).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끊임없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결국 거부와 완악함으로 일관한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끈질기고 인내로 가득하지만, 사람의 완악함은 그 은혜를 끝내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8). 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과, 하나님의 임재가 떠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며,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성취됩니다.

“너희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23:39)는 말씀이 마지막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종말론적인 예언이며, 주님 다시 오시는 날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은혜의 날이요, 회개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면 심판의 날이 오며, 누구도 그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마음은 끝까지 애통하십니다. 그는 정죄하시는 심판자가 아니라, 끝까지 품으시려 애쓰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부르심을 외면하지 말고, 지금 이 시간 겸손히 돌이켜야 합니다.

전체 결론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시기에 하신 심판적 설교입니다. 외식과 위선, 형식과 권위에만 집중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일곱 가지 화는,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한 거울이 됩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직분, 형식보다 중심과 진실을 보십니다. 참된 제자는 랍비가 아니라 종이 되며,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예루살렘을 향한 부름처럼, 지금도 주님은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고 그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 우리의 경건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야 하며, 겸손히 주 앞에 서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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